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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창] 정여립과 이몽학의 난_정승열 법무사(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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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용 기자 | 2022.05.28 14:07 입력

정승열 법무사.jpg


※ 외부 기고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선 사회는 건국 세력이던 훈구파와 신진 사림파의 대립과 갈등으로 무오. 갑자·기묘.을사 4대 사화로 무고한 선비들을 죽이더니, 고질적인 동서 붕당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임진난이 발생하기 3년 전인 1589년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이 선조에게 비밀 장계를 올렸다. 전라도 출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알린 것이다.

 

정여립은 서인이었다가 동인으로 변신한 인물로서 고향으로 낙향하더니, 학문을 강론한다고 무뢰배와 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를 만들고, 도참설로 민심을 현혹하여 세력을 황해도까지 넓혔다는 것이다. 선조는 즉시 우의정 정철(鄭澈)에게 그 조사를 맡겼다. 예조판서와 대제학으로 있다가 1585년 동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했던 정철은 사건 조사를 명령받자, 동인에 대한 앙갚음과 정권 장악의 기회로 삼고자 단단히 별렀다.

 

정여립을 체포하기 위해 의금부 도사가 전라도로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해주에서 달려온 변승복을 통해서 고변 소식을 듣고 진안에 숨은 뒤였다. 진안 현감이 관군을 이끌고 정여립을 추격하자, 정여립은 변승복과 함께 자결했다. 이후 정철은 3년여 동안 정여립과 친교가 있거나 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1,000여 명을 처형했다.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하는데, 동인의 영수 격인 이발(李潑)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고, 이산해(李山海)·정인홍 등도 관직에서 쫓겨났다. 경남 산청의 선비 조식의 제자 최영경(崔永慶)도 역모의 괴수 길삼봉(吉三峯)으로 지목되어 옥사하고, 서경덕의 제자 정개청도 옥사했다. 이후 동인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전라도는 반역향(反逆鄕)으로 낙인찍혔다.

 

그런데, 정여립 모반사건의 뒤에는 충청도 출신 송익필(宋翼弼)이 있었다.

송익필의 할머니 감정(甘丁)은 노비 출신이었으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이 안처겸의 역모 사건을 고발한 공으로 공신이 되었다. 그러나, 1586년 이발·백유양 등 동인에 의하여 역모가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감정의 후손 70여 명이 모두 노비로 환천되자, 그들은 변성(變姓)하고 도피 중이었다. 그런 송익필이 정철의 집에 기거하면서 동인들의 처벌을 조종했다는 것이 공지의 사실로서 정여립 옥사(獄事)의 순수성을 의심받게 하고 있다.

 

서인의 동인에 대한 지나친 보복과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가져와서 3년 뒤인 1591년 6월,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을 하자는 건저의 사건으로 실각하게 되었다. 이때 동인은 정철의 처리를 놓고 강온파로 갈라졌다. 온건파는 이황(李滉). 류성룡의 학통을 잇고, 지역적으로는 경기와 경상좌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었고, 강경파는 경상우도 출신 정인홍,곽재우 등 북인이었다. 이렇게 조정이 갈가리 찢긴 상황에서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불과 스무날 만에 한양을 점령하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달아났다. 고관대작들이 그렇게 북으로 달아났을 때, 전국 방방곡곡에서 농민과 선비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왜군과 싸웠다. 임진년 12월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1596년 7월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다.

 

본래 왕족의 서얼로서 한양에서 살았던 이몽학은 품행이 불량해서 아버지에게 쫓겨나 지금의 부여군 홍산면인 홍산현 구룡에서 살던 자였다. 그는 군량미를 모으러 다니던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휘하에서 활동하면서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만들더니, 홍산 무량사(無量寺)에서 장정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승려와 농민과 노비 등 6~7백 명을 이끌고 홍산현을 습격하여 현감을 죽이고, 이어서 임천, 부여, 정산·청양·대흥 등 6개 고을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길목인 홍주성(洪州城) 공격에 나섰다.

 

7년 전 정여립이 반란의 음모단계였다면, 이몽학은 한발 더 나아가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때 한현은 부친상을 당하여 홍주로 가면서 거사를 일으키면 내포(內浦)에서 상응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한현은 이미 면천군수 이원(李瑗)에게 체포된 상태였다. 이몽학의 반란군이 홍주성 공격에 나섰지만, 홍주성 함락이 불가능해지자 덕산(德山)으로 달아나다가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한편, 한현 등 반란 가담자들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람이 33명이었고, 외방에서 처형된 사람도 100여 명이나 되었다. 외적과 싸우는 전쟁 상황에서 오합지졸 농민병 1,000여 명으로 반란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 의문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조정이 얼마나 허술했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몽학 난에 대한 조정의 대응이었다. 선조가 한현을 친국(親鞫)할 때, ’병조판서 이덕형과 의병장 김덕령과 홍계남, 곽재우, 최담령, 고언백이 반란에 가담했다‘고 자백하자, 이들도 붙잡혀갔다. 왜란이 벌어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폭발적으로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을 의병 총괄 책임자로 삼았는데,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명망 있는 병조판서, 도원수, 의병장 김덕령 등도 함께하기로 했다며 거짓으로 선전한 것을 그대로 믿은 것이다.

 

조사 결과 홍계남과 곽재우는 풀려났으나, 김덕령은 국문을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죽었다. 사실 의병장 김덕령을 죽여야 한다고 건의한 자는 영의정 류성룡과 조정 대신들이었다. 그 후 들불처럼 일어났던 의병들이 정유재란 때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김덕령은 정권이 바뀐 뒤 충장공(忠壯公)으로 추증되었고, 광주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충장사와 충장로에는 그의 동상도 세워졌다. 전후 7년에 걸친 임진. 정유재란은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수령이자, 동북아를 뒤흔든 국제전쟁이었다. 그 결과 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도요토미가 죽고 에도 바쿠후가 들어섰고, 조선을 돕던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 청나라가 들어섰다. 그러나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어리석은 임금은 권좌가 튼튼했고, 관료들은 고질적인 당파싸움을 계속했다. 죽어나는 것은 가족과 재산을 잃고, 수탈당하는 불쌍한 백성들이었다. 예나 제나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않고, 당리당략을 덧씌운 채 어리석은 위인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 이선용 gosiweek@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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